아게하의 나비효과
여름깃 외전 공개 본문
지난 2월 12일,
리디북스 단독으로 전자책 판매를 시작한 기념으로,
아게하의 <여름깃>, 외전을 공개합니다.
1부는 주인공들과 관련된 이야기이고,
2부는 조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부는 달달하고, 2부는 버석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용기가 필요했던 모험이자 도전이었고,
전작과 비슷한 분위기를 기대하셨을 분들에겐
꽤 문제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관심 가져주시고 아껴주신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다음엔 조금 더 색다른 작품으로 다가가겠습니다.
아!
http://navieffect.tistory.com/75
요 링크를 타고 가시면
<여름깃>의 목차로 소개한 '음악'들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본편의 해당 챕터와 음악을 함께 즐기시는 걸 추천합니다.
ㅡ Alpha and Omega ㅡ
Edvard Munch (1863. 12. 12 ~ 1944. 01. 23)
여름깃 Summer Plumage
- 외 전 -
제 1 부
< 1 > 임희수의 르포르타주 - ‘D에 관하여’
#1.
계집애가 무슨 영화감독이냐며, 카메라 잡고 싶은 거면 차라리 신문방송학과에 가라는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꿈을 포기했던 영화광 임희수. 그녀는 20세 봄날, 학교 내 고교 동문들이랑 동아리 가두모집에 구경을 갔다가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가무잡잡한 얼굴, 크고 맑은 눈동자, 건강하고 깨끗한 피부, 희고 고른 치열의 소유자, 커다란 입을 벌려 시원하게 웃던 그 사내,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신입생들의 주위를 끄느라 정신이 없던 그 사내를. 학교엔 연극영화과 자체가 없었지만, 영화를 제작하는 그 동아리만큼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편이었다. 동아리 출신 유명감독들도 꽤 있었고.
아무튼, D는 그녀보다 나이는 한 살 많은 주제에, 키는 30cm 정도 더 컸다. 커다란 골격에 탄탄한 몸, 멀쩡하게 생긴 얼굴의 권유를 받은 친구들이 갑자기 홀린 듯 동아리에 입회하겠다는 원서를 썼고, 희수도 덩달아 사인을 해버렸다. 당연히 부모님께는 비밀이었다.
며칠 후 열린 동아리 오리엔테이션, 첫인상이 참 좋아서 연기를 하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그저 얼굴마담인 줄 알았더니, D는 2학년인데도 이미 동아리 회장이며, 감독을 지망한다고 했다.
“반갑다, 임희수! 도요한이다!”
눈앞에 펼쳐진 커다란 손을 보며, 희수는 작은 손을 내밀었고, 그 악수로 결국 D와 엮이게 되었다. 그땐 그녀도 미처 알지 몰했다. D의 실체에 대해서.
#2.
제아무리 까칠하고 시니컬한 임희수라도,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D는 꽤 괜찮은 인간이었다. 인성부터 괜찮았다.항상 마지막까지 남아서 끝까지 정리했고, 누가 사고를 쳐도 나무라기보다 뒷수습을 의논했다. 손해를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낌없이 베푸는 여유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젠 체하지 않았고, 얼굴을 찌푸리는 일도 없었다. 가식 없이 솔직했고, 잘 웃었으며, 잘 울었다. 어디서 뭘 배우고 다녔는지, 아는 것도 참 많았다. 그걸 언어로, 글로 탁월하게 표현해냈다. 친구들 사이에서 홀로 ‘영화광’이어서 외로웠던 희수는 처음으로 말이 통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기뻤는데, 심지어 D에게선 무언가를 배울 수도 있었다. 게다가 D는 성실하고 건강했다. 동아리 활동을 그렇게 하면서 학점관리도 제대로 하고 있었다. 오래 살겠다고 담배도 안 피우고, 과음도 하지 않았다. 상스런 욕설을 내뱉는 일도 없었다.
솔선수범의 아이콘! 지덕체에 리더십까지 겸비한 사내!
과 생활과 동아리 사업을 동시에 추진하는 걸 보면 어쩔 땐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럴 땐 한 살이 아니라, 다섯 살은 많아 보였다. 존중과 배려가 일상이다 보니, 주변에서 D를 험담하거나 흉보는 사람도 없었다―장난은 많이 쳤지만―. 남녀노소, 모두가 그와 쉽게 어울렸고, 웃으며 대화를 하고, 즐겁게 무언가를 만들어나갔다. 희수는 동아리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창의적일 뿐 아니라, 권위적이거나 강압적이지 않아서 참 좋았다. 꼰대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할까? 막내라서 의견이 무시당하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듣기론, D가 입부하기 이전엔 엄청나게 권위적인 동아리였었다고. 그리고 그걸 앞장서서 바꾼 게 D였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희수는 그저 D의 뒤를 열심히 따르면, 자신의 삶도 영화판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 ‘하고 싶은 것’이 사라져 암울했던 인생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녀의 꿈도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한번뿐인 인생, 어떻게든 영화에 닿아 살고 싶었던, 그 꿈!
그 순간부터, 희수는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D를 후배이자 동지로서 보필하기 시작했다. D가 움직이기 전에 먼저 움직였고, 언제 어디서든 앞장서서 그의 일을 묵묵히 도왔다. 얼마나 그랬을까. 밤늦게까지 회의를 했던 그날, 늦었다고 집 앞까지 태워다 준 D가 그런 말을 했다.
“희수야, 넌 영원히 내 연출부였으면 좋겠다. 그래도, 담배는 좀 끊고!”
희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영원히’라뇨! 제가 보필하는 건, 선배가 ‘감독’으로서 성공하실 때까지일 거예요. 그 다음엔 나도 내 인생 걸고 작품 만들어야죠. 이제 아시겠죠? 선배는 제 원대한 목적을 위한 ‘수단’입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셔요.”
그때, D는 고개를 한번 크게 끄덕하더니, 엄지를 척 내세웠다.
“알았으니, 담배는 좀 끊고! 오래오래 같이 살자!”
#3.
어느 날, 임희수의 마음에 한 가지 의혹이 생겼다.
‘저 허우대에, 저 친화력이면, 동기든 선후배든 여자 문제로 분란을 일으켰을 법도 한데!’
암암리에 D의 과거에 대해 알아봤다. 그랬더니, 그녀가 동아리에 들어오기 이전이나 이후나, 한 번도 그런 역사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희수는 한동안 골똘히 생각했다.
‘게이인가?’
그러나 게이라고 하기엔, 이상하게 여자들이 줄줄 따랐다. 저도 모르게 뭔가를 뿜어내거나 흘리고 다니는 것 아니겠나.심지어 희수가 동아리에 가입한 후, 일주일 만에 만취한 상태로 고백 타임을 벌이는 신입생이 나타났다.
“요오한 슨배, 저 슨배, 지이짜지이짜 됴아해요오!” (그 이후로 희수는 그 친구를 다시 볼 수 없었다.)
희수가 동아리에 가입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때, 그녀에게 남몰래 키운 마음을 고백하는 동기들이 셋이나 되었다―심지어 그 중 한 명은 남자였다―. 희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왜들 저렇게 저 자를 좋아하는 걸까. 저 자의 연인이 되고 싶어 안달하는 것일까.
D는 진입장벽이 낮았다. 타고난 휴머니스트답게, 그에겐 ‘벽’이나 ‘악’이 없었다. 모두에게 친절했고,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가까이에서 부대끼며 지내다 보면 자연스레 ‘호감’이 생길 수밖에 없는 사람인데다, ‘선배’라는 단어로부터 후광까지 얻었으니, 제각각 연심으로 착각하거나 상상을 키우는 것도 가능했다.
그들이 그러거나 말건, D는 신경 쓰지 않았다. 용기를 낸 누군가가 고백을 하더라도,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다.그런 걸로 우쭐해하거나 자랑거리로 삼지도 않았다. 심지가 굳은 사람이었다. ‘선물을 대하는 태도’만 봐도 그랬다.
D는 책처럼 못 먹는 물건을 선물 받으면 동아리에 기부하거나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쿠키나 케이크를 선물 받은 날이면 동아리방에서 다 같이 나눠먹었다. 뭐 하나, 챙겨서 집으로 가져가는 꼴을 못 봤다. 그를 연모하는 동기들의 마음이 스러지는 것이 안타까웠던 희수가 하루는 대놓고 따져 물었다.
“선배, 선물 준 사람 성의도 생각해야죠!”
“말했어. 나 집에 안 가져간다고. 그래도 괜찮으니, 받아만 달라던데?”
그 말을 듣는 순간, 희수는 D의 새로운 면모를 파악했다. 의외로 냉정한 구석이 있었다. 마음 한 구석에 무시무시할 정도의 벽이 있는 인간이었다.
“헐! 왜 그랬어요?”
“신경 쓰이게 하기 싫어.”
‘누구를?’
그때, 선배 한 명이 설탕가루가 잔뜩 묻은 도넛을 들며 끼어들었다.
“희수, 너 몰랐어? 요한이 ‘색시’ 있어.”
“인마! ‘형수님’이라고 하랬지? 아, 전화 온다! 잠깐만!”
무슨 전화인지, 부리나케 달려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던 희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요한 선배, 결혼했어요? 스물한 살에 유부남?”
또 한 명의 선배가 끼어들었다.
“거의 그런 수준 아닌가? 저 커플, 고딩 때부터 사귀었을 걸?”
“저 자식한테 눈독 들였던 여자선배들, 동기 여자애들 쟤 철벽에 죄다 나가떨어졌지. 은근히 단호하고 못 됐어, 저 자식.”
“색시바보야, 쟤는. 색시가 영화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둘 걸?”
“그만두기만 하겠냐? 아예 보지도 않을 걸?”
그 말에 희수는 어쩐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미 희망이 생겼는데! 완벽한 수단인데!
‘저 인간이 영화도 그만둘 정도라고?’
“누군데요?”
“얼굴은 우리도 몰라. 우리학교, 의예과랬지, 아마?”
게다가 ‘의대’라니!
“야! 안 그래도, 내가 접때 카페 앞에서 두 사람 우연히 봤는데, 장난 아니더라. 긴 생머리, 흰 티셔츠, 검은 진, 와우! 멀리서 봐도, 실루엣만으로 기대감이 아주 쭉쭉빵빵! 키도 꽤 커서, 운동화 신고 있어도 요한이 자식이랑 잘 어울려. 손잡고 가는 뒤태만 봐도 천생연분이더라.”
“그 정도야?”
“요한이 자식, 아무도 눈에 안 들어올 만하겠더라.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번씩은 다 쳐다봤으니까. 둘이 걸어가니, 모세의 기적이 뭔지 알겠던데?”
“그 정도면, ‘색시바보’로 살아도 행복하겠네. 아, 어째서 나는 고교 3년 동안 그런 인연 하나 없었을까?”
“인마, 너 남고 나왔다며?”
“자식아, 옆 학교라도! 하다못해, 옆 동네 여고라도!”
그런 상황은 이듬 해, 가을까지 이어졌다. 3학년 1학기를 마친 D는 10월 입대를 앞두고 휴학했으나, 동아리방에는 꼬박꼬박 나왔다. 2학년들과 밥과 커피와 술을 함께 하며, 자신이 없는 동안 잘 지내라며, 이런저런 당부를 남겼다. 그러던 중, 가을을 타던 1학년 신입생이 희수에게 개인면담을 신청했다.
“언니, 저 요한 선배님한테 고백할까 하는데요.”
희수는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으레 있는 일이었다.
“근데, 혹시 언니도 그 선배님 좋아하시는 거 아니죠?”
그때, 동아리방 문이 벌컥 열렸다.
“어우, 미안! 너희들, 심각한 얘기 중이었구나?”
눈치도 빠른 D였다.
“임 대장, 회의 좀 늦춰도 될까?”
“왜요?”
“우리 색시, 쉬는 시간이라! 시험 치느라 점심도 못 먹었대. 간단히, 샌드위치 먹으러 갈 거라는데, 혼자 먹게 할 순 없잖아.”
희수는 앞에 앉은 후배를 생각하니 말문이 막혀 입을 벙긋거렸다. 그녀가 그러는 동안, D는 “이따 보자!”는 말만 남기고 문을 닫아버렸다. 아주 잠깐, 왼손 약지에 낀 금반지가 스스로 빛을 발한 같았다.
‘눈치 빠르다는 거 취소!’
D는 본의 아니게 끼를 부리고 다녔지만, 근본은 쓸데없이 단호한 ‘철벽남’이었다. 동시에, ‘색시바보’였다. 어쩌면 그냥 바보였을지도.
#4.
제대 후, 학교로 돌아온 D는 많이 변해 있었다. 틈만 나면 담배를 태우고 술을 과하게 마셨으며, 끼니를 걸렀다. 그 건장했던 몸이 홀쭉해진 만큼, 웃음이 사라졌고 말수가 줄었다. 보는 사람마다 아파 보인다며 걱정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것이 분명했다. 원인은 ‘색시와의 이별’일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희수는 캐묻지 않고 묵묵히 그를 따랐다. 아버지가 뒷목을 붙잡는 걸 보면서도 방송국 입사준비를 때려치우고, D를 따라 영화아카데미까지 들어갔다. D는 군대에서부터 써온 시나리오를 이명진 감독에게 넘겼고, 그 시나리오는 그에게 메이저 각본상을 안겼다.
D는 상을 받은 직후, 처음으로 그런 말을 했다.
“희수야, 그 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이 상은 네 거다. 그래도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드네. 너한테 좋은 ‘수단’이 되어줘야 하는데, 여러모로 부족한 선배라 유감이다.”
그러면서, D는 트로피를 희수에게 주었다. 그는 예전부터 남이 주는 선물에 미련이 없는 사람이었고, 그것조차 집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그 트로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희수는 담배를 끊었다. 조금이라도 건강해져 D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해주고 싶었다. D가 다시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고 싶었다. 담배를 끊고 싶게 만들고 싶었다. 그를 두고 늘‘나의 수단’이라 이르며 앞에서 길을 터주는 사람쯤으로 여겨왔던 그녀의 마음에, 그런 기분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어떻게든 돕고 싶었다. 절대로, 망가지면 안 되는 가치를 지닌 사람이었기에. 역부족이었지만, 희수는 최선을 다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녀가 잘 보관해뒀던 그 트로피는 D의 영화사 사무실 장식장에 올라갔다. D가 받은 수많은 트로피와 함께.
#5.
임희수는 이명진이라는 남자와 결혼 2년차에 임신을 했다. 그 소식이 SNS를 통해 공식적으로 알려진 그날, D에게서 연락이 왔다.
“희수야, 뭐 먹고 싶니? 우리 집으로 와! 유인이가 마당에서 바비큐 파티 열어준대!”
약속시간에 늦지 않게 갔더니 D는 아이를 등에 업은 채 고기를 굽고 있었다.
“도도, 아빠 힘들어. 엄마한테 와.”
그러나 돌도 안 된 아이는 널찍한 등판을 두드리며 웃기만 할 뿐, 엄마에게 손을 뻗지는 않았다.
“괜찮아. 내 등짝이 더 편해서 그래. 아직까진 그렇게 무겁지도 않아.”
“아냐, 얘 요즘 부쩍 무거워졌어. 그러다, 허리 나가.”
“너는! 내 허리 알면서! ……나 요즘 이상해?”
“응, 조금.”
그 말에, D는 집게로 고기를 들다가 떨어뜨렸다. 그의 아내는 자그마한 비명을 질렀고, 아들은 까르르 웃으며 D의 등짝을 두드렸다. 냉정한 철벽 안에서 D는 우주 최강의 팔불출이었다. 테이블에 앉아 세 사람을 지켜보며 희수는 남편과 함께 기가 막혀 웃었다. 동시에, 눈을 깜빡여 물기를 말려야 했다. D와 그 가족이 함께 있는 모습은 늘 그랬다. 참 보기 좋으면서도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풍경이었다.
희수는 새삼 깨달았다. 그녀가 스무 살 때 보았던 D의 모습은 두 사람이 함께였기에 가능했었다는 것을. 그리고 생각했다. D가 행복해져서 다행이라고. 다시 웃음을 찾아서, 다시 바보스러워져서 다행이라고.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어떤 신이 도와줬는지는 몰라도, 참 고맙다고. 앞으로도 이 가족을 오래오래 지켜보고 싶다고.
아! 거한 저녁을 대접받은 이명진 감독님은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 전, 가장 아끼는 후배에게 경고했다고 한다.
“죽을래? 나이 많은 형 디스크 도지는 거 보려고 작정했구나, 도요한!”
< 2 > 도도, 도율록 都燏鹿
#1. 도요한씨와 고유인씨의 아들, 나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도도’라 불렸다.
세종대왕님처럼 어질고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그분의 이름인 ‘도’.
피타고라스가 고안한 7음계의 시작과 끝인 ‘도’.
#2. 내가 태어나던 날, 외할머니와 엄마는 오래간만에 서로를 끌어안았다고 한다.
“힘들었지? 고생 많았다.”
“나는…… 엄마 같은 엄마는 안 될 거야.”
“안 말려. 네 자식이니 마음대로 해.”
“다시는 엄마랑 솔직한 대화 같은 거 할 생각 없었는데, 아까, 제일 아픈 그 순간에…… 그 옛날, 엄마도 이렇게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왜 그렇게, 동생을 안 낳아줬는지 조금은 이해도 되고.”
“알면 됐어.”
“그 옛날의 엄마에게 고마워졌어. 무섭고 힘들었을 텐데, 낳아줘서. 건강하게 키워줘서.”
“더도 덜도 말고, 딱 너 닮은 아이로 키우렴. 꽤 행복할 거야.”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서 돌아서는 외할머니를 엄마가 불러 세웠다고 한다.
“한번만, 안아주고 가요.”
“…….”
“응석부릴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났으니까, 같이 늙어가는 처지니까, 이젠 좀 마음껏 안아줘도 괜찮잖아!”
그날, 엄마도 외할머니도, 꽤 오랜 시간 울었다고 한다.
#3. 외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작명소에 가서 큰돈을 주고 이름을 지어왔지만, 엄마는 본인이 지은 이름을 고집했다고 한다.
“예쁘지 않아? 빛날 율燏에, 사슴 록鹿. 빛나는 사슴!”
그 말에, 아빠는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예쁘긴 한데, 유인아, 그날 그건! 사슴이 아니라, 노루였잖아.”
“사슴과라며?”
“그래도, 노루는 노루야. 그렇게 이름을 지을 거면, 노루 장獐자를 써야지.”
그 말에, 엄마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싫어, 싫어, 사슴이 좋아!”
애교를 부리는 엄마를 보며 아빠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그럼 그렇게 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엄마 이마의 주름이 펴지는 것만으로도,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이 뽀뽀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아빠는 행복했다고 한다.
“요한이 너는 어때? 무슨 이름이 좋아?”
“나는 그냥 ‘도도’가 좋아. 입에 붙어서 그런가, 정들었어. 도도 아빠. 좋잖아?”
“둘 다 부르자, 그럼! 그깟 이름 좀 많아지면 어때?”
그렇게, 나는 <도도, 도율록>이 되었다.
#4. 네 살, 여름, 아빠의 외할아버지의 묘소에 다녀온 날, 엄마와 아빠가 다퉜다. 아빠는 나를 품에 안고 있었고, 계절학기 시험을 치고 저녁 무렵 집에 돌아온 엄마는 피곤해했다. 나는 졸려서 자꾸 눈이 감겼다.
“지난달엔, 강사가 쫓아오더니, 이번엔 또 어떤 놈이야?”
“조교야. 뭐 좀 물어보려 과사무실에 갔던 것뿐이고. 그 다음부터 그래. 전화번호도 다 차단했어.”
“그걸 왜 말을 안 해? 너 또 막 웃어주고 그랬지?”
“그럼 초면에 막 화내? 별 일도 아닌 거 갖구!”
“별 일이 아니야? 재수 준비할 때부터 몇 명 째냐고, 도대체!”
아빠는 서른다섯에 학교에 다시 들어간 여성, 그것도 유부녀에 아이엄마인 여성 뒤로 스물을 겨우 넘긴 녀석들이 따라붙을 거라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고, 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때, 엄마는 샐러리맨이 된 기분이었다고 한다. 퇴근 후,집으로 바로 돌아오지 않고 다른 데에 들렀다 오는 바람에 아내에게서 잔소리를 듣는, 그런 샐러리맨.
“요한아, 그만하고 록이 이리 줘. 우리 사슴 눈에 졸음이 가득해. 눕혀서 재워야지.”
“싫어! 보면 몰라? 우리 부자, 지금 한 몸으로 농성중이야!”
“그럼, 나 다시 나갈까?”
“뭐? 어딜 또 나가?”
“시험 끝났다고 같이 수업 듣던 애들이 ‘언니, 누나’ 놀러가자고 하는 것도 다 물리고, 나는 내 남편 보고 싶다고 득달같이 달려왔는데, 이게 뭐야?”
그 말에, 정적이 이어졌고, 이내 아빠의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많이 보고 싶었어?”
“응.”
아빠는 나를 안은 채 엄마도 끌어안았다.
“나도 보고 싶었어.”
엄마냄새가 훅 끼치니 나는 더 졸렸다.
“할아버지는 잘 계셔?”
“응. 아주 잘 계시더라. 돌아오자마자 저녁밥 준비했어. 너 좋아하는 갈비찜이랑 잡채 만들었어.”
엄마가 내 얼굴과 아빠 얼굴에 뽀뽀를 해주었다. 아빠가 웅얼거렸다.
“다른 놈들한테 웃어주지 마.”
엄마는 낮게 키득거렸다.
“여보, 도요한씨. 일단, 우리 아들 좀 침대에 눕히면 안 될까?”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두 사람에게 시간을 주고 싶었으니까. ‘우리 아들은 참 착한 아들’이라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나는 곧, 행복한 사슴이 되어 금빛 벌판을 달리는 꿈을 꾸었다. 옆구리에서 예쁜 날개가 돋아났다. 새파란 하늘 위로,더 위로, 신나게 달리고, 있는 힘껏 날았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 빛나는 사슴이 보물을 물어다 줄 거예요.’
제 2 부
< 3 > 조현창 趙鉉昌
#1. 1984, 1月, 고해告解
1801년, 신유박해 혹은 신유사옥. 신유년에 벌어진 천주교 대탄압.
정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 김씨는 가톨릭 신자들을 가혹하게 괴롭혔다. 그 명목은 성리학적 질서를 무너뜨리는 제사거부와 신분제를 거부하는 만인평등사상의 불순함. 이는 노론 벽파에게 있어, 시파와 남인을 제거하는 정치적 구실로 더할 수 없이 적합했다. 300여 명이 고문 끝에 죽거나 사약을 받아 죽었으며, 다산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정치적, 종교적 박해를 피해 전국을 떠돌던 40여명의 신자들은 어느 산골에 정착하기에 이르렀고,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그 후손들은 스스로 나무를 패고 벽돌을 구워, 11년에 걸쳐 자신들의 성소를 건축했다. 그렇게, 한반도에서 네 번째 성당이 완성되었다. 1907년이었다.
그로부터 77년 후, 옛 모습 그대로 신발을 벗고 마루 위를 걸어야 하는 그 건물에서, 서른여섯의 바오로 신부는 주일 미사를 반시간 앞둔 채 고해성사를 듣고 있었다. 하얀 입김이 좁고 어두운 공간을 가득 채웠고, 잔뜩 오므린 발가락이 금방 얼어붙을 것처럼 아릿했다. 지독하게 추운 날이었다. 그와 칸막이를 하나 둔 채, 조용히 십자성호를 긋는 사내의 입에서도 허연 김이 흘러나왔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재작년, 바오로가 이 성당에 왔을 때에도 베드로는 그렇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기도를 올린 후 죄를 고백했다. 대부분은 자신을 뒷바라지하느라 홀로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아무 힘이 되지 못하는 데에 기인한 죄책감이었다. 어려운 집안사정을 알고 있음에도 멀쩡한 몸으로 돈을 벌기보다, 편안하게 학교를 다니며 소설을 짓는 꿈을 꾸고 있는 점을 자신의 죄라 고백했다. 그 담담한 목소리엔 허리가 구부러지도록 화전을 일구고 약초를 캐며 사는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안전한 길을 벗어나지 않고, 남들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무난하게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섞여 있었다.
그때, 베드로의 나이 불과 열아홉, 조숙했다. 그것은 홀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장손이자 종손이라는 입장뿐 아니라, 그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사연 때문이기도 했다. 삼한갑족, 독립군, 빨갱이, 6.25참전자, 부역자, 데모꾼, 연좌제 등등, 영욕의 단어가 뒤섞인 조상과 친인척의 역사는 그를 한없이 짓누르며 숨죽이게 만들었다. 대대손손 멸문지화, 패가망신, 풍비박산 속에서 살아남은 단 한 명의 사내아이. 그는 세상을 등지고 산속으로 숨어든 모친 덕분에 지금껏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1981년, 연좌제는 공식적으로 위헌이 되었으나 그 핏줄을 감시하는 세력과 세상의 시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전엔 군입대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던 지위는, 홀어머니를 모시는 독자이니 오지 않아도 된다는 통지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풍문으로 그런 사정을 들은 바오로 신부는 요 몇 년 묵묵히 베드로를 지켜보았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차분한 눈빛, 조금 어두워 보이는 안색, 웬만해선 웃지 않는 베드로는 태풍이 불든 폭설이 내리든 미사에 빠지지 않았다. 어린이와 노인에게 친절했고, 총명하며, 부지런하고 성실했다. 비록 몸에 걸친 옷자락이 곰삭았을지언정 청결했고, 자세와 어투 또한 단정했다.
작년 2월, 고교를 졸업한 후 베드로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돈을 벌었다. 밤이고 낮이고 가리지 않고 우시장과 도축장에서 죽은 짐승의 피와 내장을 헤집으며 노동을 했다. 바오로 신부는 베드로를 볼 때면 철없는 막내 동생을 떠올리곤 했다. 그 나이에는 그런 모습이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간 지은 죄를 뉘우치고 사실대로 고백하십시오.”
거기까지 말한 바오로는 코끝이 간질거려 얼굴을 조심스레 찡그렸다.
“아멘.”
해가 바뀌어 스물한 살이 된 베드로는 나지막이 응답을 하더니,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마지막으로 고백한 것은 2주 전입니다. 그간, 제가 저지른 죄를 고백하겠습니다.”
잠시 닫혔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사랑하는 여인이 혼전에 생명을 잉태했습니다. 용서하소서.”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서 바오로 신부는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베드로는 한 살 연상의 소피아와 이상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소피아, 듣지도 못하는 소피아, 볼품없고 병약한 몸이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온화한 성정으로, 철없이 놀리는 아이들 앞에서도 환하게 웃던 소피아. 베드로는 그런 소피아를 보면서 웃곤 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베드로는 소피아와 혼인을 하고 싶다며 허락을 구했고,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장애를 지닌 여식일지언정 저주받은 집안에 보낼 수 없다고. 그래도 베드로는 그 반대에 굴하지 않았었는데…….
“생명은 귀한 겁니다, 베드로.”
“압니다. 그런데, 제 아이가 아닙니다.”
“…….”
“전 그녀를 범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몸은 그저 곁에 있는 것이면 됐습니다. 저에겐, 그저 존재가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차라리 그 방법을 택했다면 어땠을까,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그런 끔찍한 일을 겪고 있음을 까맣게 몰랐습니다. 용서하소서.”
그 대목에서, 바오로는 저도 모르게 눈을 떠야 했다.
“그녀의 부친에게 간청했습니다. 허락해달라고. 목숨을 걸고 내 아이처럼 키우겠다고 무릎을 꿇고 빌었습니다. 그러나 엊그제, 그녀의 이름 석 자는 기어이 절름발이의 호적에 올랐습니다. 그녀를 찾아갔습니다. 도망가자고 붙잡았습니다.죄를 졌습니다. 타인의 아내를 훔치려 했습니다. 용서하소서.”
차분했던 목소리가 점점 더 빠르고 거칠어졌고, 종국엔 무언가가 목구멍을 콱 막은 것 같았다.
“그 여인은…… 소피아는, 미래가 없는 아이로 키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차라리 절름발이와 벙어리의 아이로 사는 것이 나을 거라고. 적어도 기회와 희망이 있을 거라고. 그녀를 통해 수화를 배운 것을 처음으로 저주했습니다.”
바오로 신부는 억지로 입을 열긴 했지만,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야 깨달은 저의 미련함과 무지를 용서하십쇼. 그녀는 저를 ‘사람’으로 대해줬습니다만, 그것은 저에게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제 귀와 입이 멀쩡해서였습니다. 쓸모없는 ‘귀와 입’이었는데 말입니다. 한때는, 그녀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고, 어떤 바람도 말할 수 없는 세계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랬다면 적어도 지금과 같은 고통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베드로! 비약이 너무 심합니다. 주님께서, 그리고 소피아가, 베드로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의심하면 안 됩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이미 이 또한 그분의 뜻임을 받아들였습니다.”
“…….”
“20년 남짓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중 10년을 성당에 나와 끊임없이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답이 나왔습니다. 앞으로는, 그분께서 바라시는 대로 살겠습니다.”
“바라시는 바라니! 계시라도 받았다는 겁니까?”
“저는 떠납니다, 신부님. 모친께도 그리 말씀드렸습니다. 대학은, 가지 않을 겁니다. 허황된 꿈도, 잊을 겁니다. 저는 저 자신을, ‘베드로’를 죽일 겁니다.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이게 제가 받은, 그분의 뜻입니다.”
그 느닷없는 신성모독에 신부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상대방의 목소리에 깃든 서늘한 기운에 놀라 다그칠 수 없었다.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엇나가는 것을 변명하기 위한 푸념이나 투정이 아니었다. 지금 조현창 베드로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억눌렀던 에너지를 풀어냈고, 그 방향을 바꾸었을 뿐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이라는 것이 끔찍했지만. 이 상황에서 소피아의 사정은 훌륭한 기폭제였다.
“떠난다니, 어디로 갈 겁니까?”
“탁 트인 곳, 드넓은 곳, 빛이 쏟아지는 곳, 힘이 고인 곳으로 가겠습니다. 마땅히 저의 것이었어야 할 것들이 있는 그곳,온갖 죄악이 똬리를 틀고 꿈틀거리는 그곳으로 말입니다. 저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고, 마음껏 죄를 짓고, 마음껏 움직이며 살겠습니다. 다만, 모친과의 절연을 용서하소서. 부끄럼 없는 집안에 귀한 여식으로 태어나, 평생을 기백으로 버텨온 분까지 죄를 짓게 할 순 없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베드로의 입에서 살기가 등등한 이죽거림이 이어졌다.
“또한, 앞으로의 죄를 미리 고백합니다, 주여! 당신께서 바라시는 대로, 당신께서 주신 이름을 버리겠나이다.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당신을 부정하며 살다가 유다처럼 갈지언정! 언제가 됐든 냉담자로서 지옥불에 떨어질지언정! 미련이 남는 일이 없도록, 억울할 일이 없도록, 그런 삶을 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는 저를 용서하소서!”
다음 순간, 오래된 나무가 사정없이 긁히며 ‘부욱’하는 비명을 터트렸다.
바오로는 소리쳤다.
“현창아!”
휑하게 비어버린 자리에 황망해진 신부가 다른 문을 열고 달려 나왔을 때엔, 청년은 어디에도 없었다. 살을 에는 바람이 불던 그 겨울날, 조현창 베드로는 떠났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을씨년스러운 내리막길에 이름 석 자만이 헐벗은 채 뒹굴었다.
“베드로!”
그 이후, 바오로 신부가 그 청년의 고백을 다시 듣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사는지는 종종, 신문으로나마 알 수 있었고, 그 소식을 청년의 모친에게 알렸다.
조현창 베드로는 자신이 간다던 그 곳으로 갔다. 땅 위의 지옥으로. 그리고 더할 수 없이 훌륭하고 화려한, ‘악’으로 자라났다. 눈 먼 인간들은 그를 동경하고 칭송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느 봄날, 바오로 신부는 침침한 눈으로 그 기사를 읽게 되었다.
‘17세 연하와의 삼혼이라.’
너무나 아름다운, 또 너무나 젊은, 세 번째 신부의 사진을 보며, 바오로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이토록 공허한 미소라니.그가 기억하는 한, 오래 전 소피아의 웃음이 훨씬 더 예뻤다.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의 미소가.
#2. 1998, 6月, 너를 위해
이름과 혈육을 버리고 고향을 떠난 조현창은 처음 3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녔다. 경제적 호황이 드리운 시커먼 그림자 속에 몸뚱어리를 감춘 채 돈이 되는 정보를 습득하고 길눈을 익혔다. 어둠 속에서 고양이가 쥐보다 유리한 건 길눈이 밝기 때문이니까.
대학을 다니는 것보다 훨씬 더 유용한 것들을 배운 시절이었다. 밀수와 사채, 때때로 군인과 조직, 공무원, 기업인, 정치인을 오가며 은밀한 메시지와 마약과 현금의 운반책을 맡기도 했고, 자살과 실종을 가장한 청부살인을 계획하거나 직접 움직이기도 했다. 조상의 역사를 통해 배운 감각과 도축장에서 배운 기술들이 꽤 쓸모 있었다.
조현창은 대부분 ‘김씨’였고, 또 어느 날은 ‘이씨’였으며, 가끔은 ‘박씨’였다. 그는 늘 홀로 움직였고, 오히려 그래서 더 부각되지 않았다. 게다가 흠 하나 없을 정도로 솜씨가 훌륭하니, 신뢰와 인정을 받을밖에. 명성이 암암리에 퍼지자,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조현창이라는 본명과 스물다섯도 안 된 나이와 평상시엔 검은 사제복을 입고 돌아다닌다는 점을 알아내기도 전에 그들이 먼저 죽었다. 다른 조직으로부터 급습을 받거나, 경찰에 쫓기다 자살을 하거나, 실종되어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후, 조현창은 호적을 세탁하고 사장 명함을 박은 후, 자신의 밑천이 되어줄 여성에게 접근했다. 일제로부터 하사받은 땅을 고스란히 지닌 채, 잘 먹고 잘 사는 집안의 하나뿐인 손녀였다. 두 살 연상이었으나 생각보다 순진했던 그녀는 감언이설을 제대로 펼치기도 전에 넘어왔다. 현창은 자신의 외모가 유용하고, 언변이 유창하다는 점을 그제야 깨달았다.
물론, 장인의 의심은 대단했다. 젊디젊은 조현창은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재산을 불려주는 것으로 의혹을 풀어냈다. 「택지 개발 촉진법」이 제정된 후, 7년이 흐른 상태였다. 때는 1987년, 선거가 두 차례나 벌어져 시장엔 돈이 흘러들었으며,공약에 언급된 지역개발 예정지에선 투기 붐이 일었다. 게다가 이듬해 올림픽을 따라 물가상승이 따라붙어, 땅값은 급격히 치솟았다. 그 상승률이 1988년엔 27%였고, 1989년에는 30%을 넘겼다. 세상은 미쳐 돌아갔지만, 현창은 쾌재를 불렀다. 세상물정에 어두운 장인이 분당과 일산에 땅을 놀려두고 있었다. 그 산과 들과 밭과 논을, ‘택지지구계획’에 포함시킬 수만 있으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국토부장관의 소관이었다.
조현창은 자신이 모아온 고급 정보들과 인맥을 십분 활용해, 성사만 된다면 얼마를 떼어줄지 거래했고, 문제는 막힘없이 처리되었다. (물론, 그는 떼어줘야 할 인물을 제거하고 그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몇 달 만에 천문학적인 부를 거머쥔 장인은 사위가 아닌 아들이라며 추켜세웠다. 허허로운 마음과 긴장을 달래기 위해 주색을 가까이 하기 시작한 현창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이어져도, 큰일 하는 사내란 다 그런 거라며 잔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또 수월하게, 밑천을 챙길 만큼 챙긴 현창은 다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더 큰 세계가 필요했다.
설상가상, 날이 갈수록 집착이 심해지는 아내는 몰래 공작을 벌여 임신을 했다. 결혼했을 당시만 해도, 평생 아이는 없으리라, 특히 이 더러운 핏줄의 여자의 자식은 끔찍하다고 생각했던 현창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얼굴을 볼 때마다 사랑을 고백하며 매달리는 모습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렇게 자신의 생물학적 아이를 만나게 된 순간, 그는 깨달았다.
‘나 또한 연좌제를 저지르고 있었군.’
서둘러 벗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 편이 죄 없는 아이를 위하는 길이었다.
아이의 돌잔치를 치른 1992년, 결혼 5년 만에 현창은 이혼을 했다. 장인에겐 곧 실시될 금융실명제(1993)의 위협에서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내밀었다. 다시 말해, 믿을 만한 조세피난처를 제공한 후 깨끗하게 이혼할 수 있었고, 그 대가로 언제든 그 집안에 찾아가 묵으며 아이를 자유롭게 만나는 것이 가능했다. 거리를 두니 아이가 조금쯤 예뻐 보이기도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조현창이 끝끝내 그 집안을 망하게 하지 않은 것은 그 아이 때문이었다.)
그 후, 조현창은 두둑한 밑천을 들고 일본으로 갔다. 이번에도 홀로 유랑하듯 돌아다니며 말과 길눈을 익혔다. 그러다 우연찮게, 한 재일교포를 만났다. 2만이 넘는 민간인이 학살당한 4.3사건, 핏빛 제주에서 도망쳐 오사카에 자리 잡은 그 노인을. 온갖 더러운 일을 마다하지 않고, 타국에서 평생을 고생해 일군 터전에서 일촉즉발의 상황을 앞두고 있던 그 노인을. 눈 한 쪽과 새끼손가락이 없던 그 야쿠자를.
한국보다 10년 앞선 일본경제는 버블붕괴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80년대 중반, 수출주도의 경제성장에서 내수로 눈길을 돌렸고, 과도한 금리인하를 동반한 소비심리창출은 주식이나 부동산에 대한 막대한 투자로 이어졌다. 거품은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다. 특히, 땅값 상승을 동반한 담보대출은 끔찍할 정도였다. 90년대 초, 조현창은 조만간 땅값과 주식이 곤두박질 칠 것임을, 고가로 평가받았던 부동산과 주식과 설비가 불량채권으로 돌아올 것을 예감했고, 고민 끝에 노인에게 알렸다. 훌륭한 대비책도.
위기를 기회삼아 사업을 몇 배 더 번창시킨 노인은 가장 아끼는 막내 손녀를 조현창에게 보냈다. 그리고 머리를 찧으며 부탁했다. 더도 덜도 말고 10년만 함께 살아달라고, 손주 사위로. 노인에게 있어, 조현창은 가장 훌륭한 조선인이었으니.그때가 1994년이었다.
한동안 주지육림에 파묻혀 살던 현창은 어느 날 자리를 털고 한국으로 들어갔다. 1997년, 그의 나이 서른 넷, 버블붕괴와 유사한 일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1달러에 800원이었던 환율이 몇 년 만에 2500원으로 올랐다. 그 날을 대비해 달러와 엔화를 쌓아두고 있었던 현창은 큰 힘을 힘들이지 않고도 큰돈을 벌어들였다. 돈은 이미 사람이 버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재산을 불려주는 것은 ‘돈’ 그 자체였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떵떵거리며 살던 친일파의 후손들이 줄줄이 죽어나갔다. (물론, 조현창과 같은 수법을 써서 재산을 불린 자들이 훨씬 더 많았지만.) 꽤 경치 좋은 곳에 골프장을 만들려 했던 어떤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현창은 그를 원통함 속에 죽게 만들었고, 아무 죄책감 없이 그곳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들의 조상의 자신의 조상에게 했던 대로.
오픈을 앞둔 어느 날, 회원권도 팔고 홍보도 할 겸, 각계에서 한다하는 사람들을 모았다. 그러나 날씨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필드에 나서자마자 가랑비도 아닌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뭐, 이럴 때도 있는 거지.’
비즈니스엔 큰 지장이 없을 터였다. 클럽하우스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뒤따르며 켄터키 블루그래스의 상태를 살피던 조현창은 지척에서 들리는 축축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조 회장, 맛이 참 좋을 듯허이.”
쉰을 얼마 앞둔 모기업 전무의 시선은 음식이 아니라, 사람에게, 앳된 계집애에게 닿아 있었다. 한동안 그들의 커뮤니티를 드나들었던 왕년의 여배우 손수진, 사업실패로 남편이 자살한 후 어떻게든 재혼 상대를 물색하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쳐 있던 그 암캐의 딸이었다. 현창은 그런 손수진이 싫지만은 않았다. 한때는 그녀의 팬이기도 했기에, ‘누님’이라 부르며 농을 던지기도 했고, 가끔은 터놓고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럴 수 있게 만드는 것 또한 그녀가 지닌 강점, 미모와 원숙함 덕분이기도 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가지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현창은 그런 유의 인간을 싫어하지 않았다. 대하고 있으면 오히려 편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고교생을 향한 중년의 음식비유는 역겨웠다. 이런 자리에 잘 키운 난초 같은 딸을 데리고 나와 선보이며 어떤 효과를 원하는 손수진이 혐오스러워질 만큼. 예쁘장한 여자들 몇 명 선 보이며 흥정을 하고 스폰서를 구하는 연예기획사 사장들이랑 다를 게 뭔가.
현창은 한숨을 감춘 채 피식 웃으며 물었다.
“탐이 나십니까?”
“하하, 이제는 강 원장 여식이 되었으니 방법이 없지. 돈이 궁하진 않을 테니.”
그렇다. 결국 무기는 ‘돈’이었다. 점점 더 그런 세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돈이면 뭐든 다 되는 세상. ‘베드로’라는 이름과 무거운 수식어를 달고 있는 집안을 버린 후, 현창은 이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달려왔다. 희망을 줬다 뺏기를 반복했다.지옥 같은 세상에서 통곡을 하고 비명을 내지르는 인간들을 보면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다. 잘 됐다고. 꼴좋다고. 방관자든 가담자든 회피자든 다 당해보라고. 가장 고귀한 자들이 당했던 그 고통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였을까? 새하얀 옷을 입고 우산을 천천히 펼치는 늘씬한 계집애를 보고 있자니, 머릿속이 캄캄해졌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고유인이라고 합니다.”
반시간 전,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할 때는 그저 어린애였는데. 손수진을 꼭 닮은 아바타였는데.
“네, 반갑네요. 잘 왔어요.”
그렇게 희미한 인상만을 남기고 지나쳤건만, 갑자기 그 존재가 뚜렷해졌다. 얼굴도, 목소리도, 몸의 곡선도. 저벅저벅 걸어가 팔을 끌어당겨 윽박을 지르고 싶어졌다.
“이런 데에 나오지 마!”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조현창이 혼자 있는 고유인에게 말을 걸었던 것은. 혼자 앉아, 비 내리는 필드의 풍경을 홀린 듯 바라보던 그녀에게.
“마음에 들어요?”
흠칫 놀라 정신을 차리는 그 눈빛엔 다른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그 순간, 조현창은 그 눈빛에서 ‘연정’의 냄새를 맡았다.그맘때면, 그럴만한 나이이기도 했다. 열여덟, 가족이 아닌 누군가를 마음에 두는 나이.
‘그런 거면 더더욱 나오지 마!’
경고를 하고 싶었다. 여긴 나 같은 자들이 배회하는 곳이라고, 지옥 한가운데라고.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그녀는 담배 연기에도 눈을 찌푸리지 않고 공손하게 재떨이를 내밀었다. 어른에게는 그렇게 하는 거라고 모친에게서 배운 모양이었다. 현창은 그 야무진 손끝을 보며 뱃속에서 뭔가가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좀 춥지 않아요?”
견딜 수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일단 그 마른 몸에 카디건을 걸쳐주었다. 그리고 직접 움직여 플라스틱에 담긴 음료 한 병을 가져다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유리잔에 따라 그에게 먼저 내밀었다. 현창은 안타까움과 흥미가 동시에 생길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스폰서가 고픈 연예인지망생이었다면 틀림없이 뚜껑을 따서 입술을 뒤집어 입에 물었을 것이다. 그게 이성에게 어떤 상상을 불러일으키는지 오래 전에 익혔을 테니까.
“혹시 궁금한 거 있으면 아무거나 물어봐요. 내가 조언하는 셈 치고 대답해 줄 테니.”
곰곰 생각을 짚어보던 그녀는 사업수완을 물어왔다. 다들 힘들다고 하는데, 우리 아버지도 힘들어서 가버렸는데, 어째서 당신은 괜찮은 거냐고. 그 맑은 눈동자 속에서 상처와 그리움이 스쳤다. 궁금한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조현창은 기꺼이 대답을 해주었다. 대놓고. 모조리.
“그자도 자살했지, 자네 친부처럼. 안타까운 일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가 그렇게 만든 거야.”
‘그러니까, 오지 마.’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시들어지는 눈빛과 창백해지는 얼굴을 보면서 현창은 자신이 목적을 달성했음을 깨달았다.그런데, 기분이 묘했다. 이상할 정도로 복잡해졌다. 명확하지 않은 기분에 정신이 사나워진 그는 헛소리를 늘어놓고 말았다.
“사업을 하다 보면 말이지. 사람의 가능성이 보여. 우리 유인 양은 꿈이 뭔가?”
그녀가 도망쳤다. ‘의예과’로. 현창은 진심으로 궁금해지는 자신이 신기했다.
“그건 꿈이 아니잖아. 난 꿈을 물었는걸.”
다갈색 눈동자가 짙어졌다.
“죄송하지만, 오늘 처음 뵙게 된 분과 꿈을 논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게 네 본모습이구나.’
그녀의 입술이 저항을 하고 있었다.
“남자 친구는 있나?”
그게 왜 궁금해졌던 걸까. 현창은 담배 연기를 뿜으며 갈등했다. 여기서 그칠 것인지, 조금 더 괴롭혀볼 것인지. 그의 행동은 자연스레 후자로 이어졌다. 조금 전 그에게 말을 걸었던 그 배불뚝이 사내가 하고 싶었을 질문들을 내뱉었고, 더러운 짓을 해버렸다. 반은 경고였고, 반은 호기심이었다.
열여덟, 소녀에서 여인네로 거듭나는 그녀는 민망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꼬락서니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예상을 빗나가는 그 도전적인 자세에, 현창은 진심으로 궁금해져 물었다.
“처녀……맞지?”
그 멍청한 질문에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는 그가 걸쳐준 옷을 끌어내려 곱게 개켰다.
“사업 수완은 그토록 훌륭하신 분이 어린 여자애 하나 기분 좋게 만드는 건 못 배우셨나 봐요.”
활짝 웃는 얼굴, 경멸이 어린 눈빛을 본 그 순간, 조현창은 어떤 옷을 억지로 입혀버리고 싶은 충동과 아예 발가벗겨버리고 싶은 충동이 한꺼번에 일어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맹랑한 청소년을 향해 손이 멋대로 뻗어나가는 것을 참다 보니 담뱃대마저 놓쳐버렸다.
“아하하!”
시원한 웃음이 터졌다. 동시에 그녀가 말한 ‘제 남자였으면 싶은, 처녀로서의 부담감을 나눠줬으면 하는 친구, 함부로 하기엔 참 소중하고 멋진 사내’가 누구일지 궁금해졌다. 조금쯤, 아주 조금쯤, 얼굴도 모르는 그 인물이 부럽기도 했다. 생매장시켜버린 베드로의 기억들이 잇따랐고, 그것은 조현창 스스로도 당황하게 만들었다.
모친이 나타나자 서둘러 자리를 뜨는 그녀를 보며, 조현창은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재밌네. 다음에 또 나왔으면 좋겠군.’
“누님! 그 보물, 잘 뒀다가 나한테 파세요. 값은 최고로 쳐드리겠습니다.”
손수진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땐 이미 조현창의 마음속에선 결정이 난 상태였다. 고유인은 조만간 그의 소유가 될 터였다. 머잖아.
#3. 2007, 10月, 그대는 어디에
“내일, 부산엔 당신이 다녀오지 그래?”
말간 눈이 이쪽을 바라보는 것을 느끼며 현창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침 식탁에서 저 얼굴과 마주한 지도, 벌써 4년째였다. 그의 아내, 아름답고 선하며, 건강하고 똑똑한 데다, 17세 연하의 여성. 사람들 앞에선 스스럼없이 그에게 팔짱을 끼고, 그림처럼 웃어주는 고유인. 그러나 그녀는 집안에서만큼은 공기처럼 지냈다. 아무 냄새도, 맛도 느껴지지 않는 공기지만, 절대 없으면 안 되는 존재. 이 집에 그녀가 살기에, 그의 발길은 어김없이 이곳으로 향했다.
“제 스케줄이 아닌데요.”
“내 귀국이 늦어질지도 모르니까.”
“……직원을 보내세요.”
“그냥 바람 쐴 겸 다녀오지 그래. 별다른 일정도 없더군. 당신 영화 좋아하잖아.”
‘영화’라는 단어에 눈 밑의 얇은 피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아니지, 당신은 ‘영화 만드는 놈’을 좋아하지.’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손수진 덕에 어부지리로 고유인을 얻은 이래, 현창을 그녀를 안고 싶었다. 결혼준비라는 이름으로 해외로 데려간 것도 그녀와 적응기간을 갖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른 여자와의 관계는 수월했으나, 그녀만큼은 어려웠다.
“건강엔 문제가 없으십니다, 회장님. 워낙 관리를 잘하신 몸이라. 이런 경우는 심리적인 문제, 즉 심인성 발기부전입니다.”
안경을 낀 의사가 어렵사리 진단하는 것을 들으며 현창은 기가 막혔다.
“주로 투사나 동일시가 이런 문제를 일으키곤 합니다. 사모님께 상황을 알리시고, 마음에 담아둔 것들을 고백하셔야 합니다.”
뜬금없이 베드로가 살아났다. 그녀를 안고 싶어질 때면 어김없이 조현창 베드로가 되어버렸다. 설레는 조베드로, 기대하는 조베드로, 희망을 갖는 조베드로. 자신이 누구인지, 무슨 죄를 짓고 살았는지 고백하고 싶어졌다. 이해받고 싶어졌다.울고 싶었다. 그걸 감추기 위해 현창은 기를 썼다. 드러내 버리는 순간, 자신이 살아온 반평생을 후회로 흘려야 하니까.그러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는데.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여인에게 상처를 주며 살았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문제임을 회피하기 위해 피임을 시켰다. (동시에, 납치를 대비한 베리칩도.)
결혼 후 이듬 해,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두었을 때, 조현창은 소피아의 죽음을 듣게 되었다. 일곱 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고. 그 소식을 들은 직후, 그는 미련 없이 소피아의 친정과 남편과 자식들을 몰락시킬 스위치를 눌렀다.
‘빌어먹을, 절름발이 새끼.’
아무리 복수를 해도 모자랐다. 자꾸만 휑뎅그렁해지는 마음이 싫었다. 설상가상, 어찌된 일인지, 고유인조차 아침 밥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엔 단순한 감기몸살인 줄 알았다. 그래서 그녀의 빡빡한 스케줄을 모두 취소시켰다. 최대한 쉬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도 집이라는 곳에 들어서면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새벽이면 잠이 든 그녀의 침대에 앉아서 물끄러미 바라보다 일어서곤 했다.
“요한아.”
잠긴 목을 비집고 터져 나오던 애절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현창은 깨달았다. 이건 감기 몸살이 아니라, 상사병이었다.지금쯤이면 그녀의 사랑이 제대를 해, 민간인으로서의 자유를 되찾았을 터였다. 무의식중에 터진 잠꼬대라 더 화가 났다.
현창은 밖으로 나갔다. 술을 마셨다. 여자들을 찾았다. 발길이 자꾸만 집으로 돌아갔다. 문을 부쉈다. 도망치던 아내가 미끄러졌고, 현창은 그녀를 강제로 붙잡아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몸이 동했다. 이번만큼은 가능할 수도 있었다. 그러다 두개골이 부서지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무너지듯 쓰러진 후, 한쪽 눈을 겨우 떴을 때, 재떨이로 그를 때리고 도망친 아내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빌고 또 빌었다. 신이 아닌 그녀에게. 그러는 동안, 베드로는 숨을 헐떡이며 울었다.
‘죽지 마. 죽지 마.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죽지 마.’
고유인의 발목이 완벽히 낫는 데엔 6개월이 걸렸다. 그 기간 동안 그녀는 틈만 나면 이혼을 요구했다. 현창은 못 들은 척으로 일관하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협박을 했다.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을 파괴시키고 죽여 버릴 거라고.끔찍해하는 그녀를 보며 그 또한 스스로가 끔찍해졌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결혼 4년 차, 가을.
조현창은 그녀가 부산에 가면 옛사랑을 만날 것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면 좀 나아질까, 이 죄책감이. 혹시 저 여자를 경멸하게 될까. 그러면 좀 닥쳐줄까, 베드로가. 그러면, 나는 저 여자를 안을 수 있을까. 아니면, 혐오스러워 영영 놓아버리고 싶어질까.’
둘이 만나더라도, 돌아오게 만들 준비는 이미 되어 있었지만, 현창은 그녀가 스스로 돌아오길 바랐다. 로또 1등보다 희박한 확률이었지만, 그녀가 옛사랑을 뿌리치고 돌아온다면 모든 것을 고백하리라 마음먹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고집스러운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부산의 호텔에 들어갔다. 포항의 호텔에 들어갔다.그래도 기다렸다. 한반도를 떠났다. 결국, 조현창은 그들을 찾아갔다. 하늘을 날아서. 다시 만났을 때, 고유인은 사랑하는 남자의 등에 업혀 웃고 있었다.
베드로는 또다시 울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지우기 위해 조현창은 있는 힘껏 소리쳤다.
“여어! 마담 보바리!”
반가워 웃음이 나왔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4. 2010, 11月, 사랑보다 깊은 상처
아내의 남자를 파멸시켰다. 다시는 다가올 수 없도록 멀리멀리 몰아냈다.
현창은 자신이 그를 미워하는 만큼, 그녀 또한 그를 미워하게 만들고 싶었다. 영원히 만나고 싶지 않도록. 그러나 고유인에게선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침 식탁에 신문을 올려둘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울 뿐. 몇 번을 두고 본 결과,그 눈물엔 미움이 섞여있지 않았다. 그저 서러움뿐이었다. 그러다 그녀가 눈물도 흘리지 않게 되었을 무렵, 현창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는 어때? 나는 미워하나?”
그녀가 허허롭게 웃으며 말했다.
“미워할 가치도 없어요.”
다행일까, 불행일까.
“나 당신을 안을 수 없어. 심인성이라더군.”
조현창은 그 옛날 고해성사를 하던 때처럼,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조현창 베드로가 죽지도 않고 되돌아왔다.
“당신을 싫어해 보려고 노력해 봤어. ……지금도 난 당신이 나를 벌레 보듯 볼 때마다 슬퍼.”
그리고 말도 안 되는 바람을 청했다.
“당신 닮은 딸이 하나 있으면 좋겠어. ……낳아줄 텐가?”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 옛날 성당의 신처럼. 그러나 현창이 방을 나서기 전 희망이 날아들었다.
“생각은 해볼게요.”
그로부터 2주 후, 선물 주문을 기분 좋게 마친 조현창은 카드를 펼친 후 한참 동안 생각하다, 겨우 한 줄을 썼다.
<거절하지 않아줘서 고마워.>
그리고 비서에게 내밀었다. 혹시 내가 일 때문에 잊더라도 계획대로, 차질 없이 전해달라고.
“댁에 바로 들어가십니까?”
“아니, 오늘은 연희한테 들러야지.”
어두워지는 비서의 표정을 보며 현창은 씩 웃었다.
“작별은 섭섭하지 않게 해둬야 할 것 같아서.”
조현창은 모델 최연희가 갓 스물을 넘겼을 때부터 후원해 왔다. 그녀에게 ‘안전’하게 있을 곳을 마련해주고, 소속사를 차려주었고, 그녀의 명품 사랑을 달래주었다. 그 대신 그녀는 그의 갈증을 달래주었다. 또, 아내의 옛 남자를 망가뜨리는 데에 일조를 했다.
그가 고유인과의 세 번째 결혼을 알렸을 때, 고유인과 동년배인 그녀는 차분하게 물었었다.
“나는 회장님 아내로서는 자격미달이죠?”
그때, 현창은 심드렁하게 대답했었다.
“알면서 왜 묻지?”
세단의 뒷좌석에 앉아, 휘황찬란한 밤풍경을 보며 지난날을 떠올리던 현창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최근 들어 하나 둘 정리되는 관계에 심신이 가벼우면서도, 어쩐지 피곤했다. 졸음이 시도 때도 없이 자꾸만 밀려왔다. 삼십년 가까이 이어진 긴장이 슬슬 풀리는 모양이었다.
팔자에 없는 선잠, 꿈이었다.
눈이 내리는 겨울 산, 그는 말할 수 없이 갈증이 나 연못가로 달려가 허겁지겁 물을 마셨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을 때, 커다란 차 한 대가 눈앞으로 달려들었다. 고유인, 그의 아내가 그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 사내, 도요한이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벌거벗은 둘을 보니 기가 막혀, 조현창은 당장 문을 열어 끌어내리고 싶었다.
‘이것들이!’
이를 갈며 팔을 뻗으려던 그 순간, 그는 자신에게 팔이 없음을 깨달았다. 굽이 달린 다리만 네 개, 털북숭이 몸, 사람이 아니었다.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을 때,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끔찍한 꿈이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서, 아내가 집안에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둘러 휴대폰을 꺼낸 그는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가 멈칫했다.
‘믿자. 안 만난다고 했으니, 한 번은 믿어보자. 정리하고, 돌아가자. 싹 다 정리하고.’
기사는 점점 더 속도를 높였고, 세단은 점점 더 집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리고 조현창 베드로는 다시는 고유인이 사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의 나이, 마흔 일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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